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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라몬 히메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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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스페인의 시인으로, 1881년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나 1958년 사망했다. 그는 모더니즘 시인으로 시작하여 순수시를 추구했으며, 대표작으로 장편 산문시 《플라테로와 나》가 있다. 히메네스는 195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나,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아내가 사망했고, 2년 뒤 그 또한 사망하여 고향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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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라몬 히메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안 라몬 히메네스
본명후안 라몬 히메네스 만테콘
출생일1881년 12월 23일
출생지스페인 안달루시아 우엘바 주 모게르
사망일1958년 5월 29일
사망지푸에르토리코 산후안
국적스페인
직업시인
배우자세노비아 캄프루비
서명Firma de Juan Ramón Jiménez.png
로마자 표기Juan Ramón Jiménez Mantecón
업적
수상노벨 문학상 (1956년)
참고
IPA/xwan raˈmoŋ xiˈmeneθ manteˈkon/
로마자 표기법Ramon /raˈmon/
기타
웹사이트후안 라몬 히메네스

2. 생애

1881년 12월 23일,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우엘바주의 항구도시 모게르에서 태어났다.[11]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세비야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12] 시 창작에 몰두하며 대학을 중퇴했다.[13]

1900년, 열아홉의 나이에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모더니즘의 대표 시인 루벤 다리오 등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첫 시집 《제비꽃의 마음》과 《수련(睡蓮)》을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해 아버지를 여읜 충격으로 정신적 어려움을 겪어 프랑스와 마드리드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시를 접하며 문학적 깊이를 더했고, 요양 중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05년 고향 모게르로 돌아와 요양하며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산문시집 《플라테로와 나》(Platero y yoes, 축약판 1914년, 완전판 1917년)를 집필했다.[14] 1911년 건강을 회복하고 마드리드로 돌아와 활발한 문필 활동을 재개했다.

1916년, 1913년부터 교제해 온 세노비아 캄프루비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인 세노비아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번역가로도 알려져 있었으며, 이후 히메네스의 중요한 문학적 동반자가 되었다. 결혼을 계기로 히메네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며 운율을 벗어난 자유시 형태의 순수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국 정부의 명예 문화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쿠바, 미국 등지를 거쳐 1951년부터는 아내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에 정착했다. 망명 기간 중에도 메릴랜드 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1956년 10월 25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사흘 뒤인 10월 28일 아내 세노비아가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 건강이 악화되어 1958년 5월 29일, 푸에르토리코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아내와 함께 고향 모게르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40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으며, 그의 작품 중 《플라테로와 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2년부터 발행된 스페인 2000ESP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사용되기도 했다.

모게르 시청 광장에 있는 히메네스의 동상


1982년부터 발행된 2000 페세타 지폐의 히메네스 초상

2. 1. 초기 생애 (1881년 ~ 1900년)

1881년 12월 23일,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우엘바주 모게르에서 아버지 빅토르 히메네스와 어머니 마리아 플라 망테콘 사이에서 네 번째 아이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11]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카디스 근처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에 있는 예수회 학교 산 루이스 곤자가(San Luis Gonzaga)에서 유년 시절 교육을 받았다.

열네 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896년 세비야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과 회화를 공부했지만[12], 곧 글쓰기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3] 1898년 대학을 중퇴했다.[13]

1900년,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안달루시아 출신 선배 시인 프란시스코 비야에스페사의 권유로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적인 시인 루벤 다리오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3] 같은 해 첫 시집 《제비꽃의 마음》(Almas de violeta)과 《수련(睡蓮)》(Ninfeas)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1900년 7월, 그의 예술 활동을 지지했던 아버지 빅토르 히메네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 2. 문학적 성장과 마드리드 생활 (1900년 ~ 1916년)

1900년, 열아홉 살의 히메네스는 안달루시아 출신 선배 시인 프란시스코 비야에스페사의 권유로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모더니즘의 기수인 루벤 다리오 등과 교류하며 문학 서클의 일원이 되었고, 다리오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 첫 시집 <제비꽃의 마음><수련(睡蓮)>을 출판했다. 그러나 7월, 예술 활동에 이해를 보이던 아버지 빅토르 히메네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다.[3]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1901년 프랑스 보르도의 정신 요양 시설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시에 대한 지식을 깊이 있게 쌓았다. 그곳에서 주치의의 아내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같은 해 말, 마드리드의 요양 시설로 옮겨 1903년까지 머물렀다. 이 요양 생활 중에도 그는 모더니스모 시인들과 교류하며 시 창작을 계속했다.

1904년경, 히메네스는 페루 출신의 호세 갈베스, 카를로스 로드리게스 휘브너, 그리고 당시 15세였던 마리아 이사벨 산체스 콘차가 꾸며낸 '조르지나 휘브너'라는 가상의 여성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에 휘말렸다. 갈베스와 로드리게스 휘브너는 히메네스의 글에 접근하려 했고, 산체스 콘차가 편지를 작성했다.[4] 히메네스는 이 가상의 인물에게 반해 페루로 직접 만나러 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그들이 스페인 영사를 통해 조르지나의 사망 소식을 거짓으로 전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5]

1905년, 히메네스는 고향 모게르로 돌아와 요양을 계속하며 시를 썼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산문시집 『플라테로와 나』(축약판 1914년, 완전판 1917년) 집필의 바탕이 되었다.[14] 1908년부터 1912년까지는 마드리드를 기반으로 한 아방가르드 잡지 《프로메테오》에 기고가로 참여했다.[6]

1911년 건강을 회복하고 마드리드로 돌아와 더욱 활발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1912년 사이에는 여러 여성과의 관계를 묘사한 에로틱한 시들을 다수 썼는데, 일부는 그가 머물렀던 요양원의 간호사 수녀들과의 성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시에 묘사된 성적 활동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다른 많은 시들은 음악과 색깔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으며, 때로는 이를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지어 표현했다.

1913년, 마드리드의 대학 기숙사(:en:Residencia de Estudiantes)에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유학생이자 작가, 번역가인 세노비아 캄프루비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1916년 1월 말, 히메네스는 뉴욕에 머물고 있던 세노비아를 찾아가 3월 2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미국 동부를 여행한 뒤 6월 7일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에 정착했다. 세노비아는 이후 히메네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자 문학적 협력자가 되었다. 결혼을 계기로 히메네스는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적 개성을 발견하고, 운율을 벗어난 자유시 형태의 "순수시" 확립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시집 《소네토스 에스피리투알레스 1914–1916》(영적인 소네트, 1914-15)를 발표했다.

2. 3. 결혼과 미국 여행, 순수시 추구 (1916년 ~ 1936년)

1913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유학 온 세노비아 캄프루비와 대학 기숙사에서 만나 연애 관계가 되었다. 1916년 1월 말,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이던 세노비아를 찾아가 3월 2일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미국 동부를 여행한 후 6월 7일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에 신혼집을 마련했다.[6] 세노비아는 이후 히메네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자 문학적 협력자가 되었다.

결혼 이후 히메네스는 '순수시'를 추구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소네토스 에스피리투알레스 1914–1916》(1916; “영적인 소네트, 1914–15”)
  • 산문시집 《플라테로와 나》 완전판 (1917) [14]
  • 《피에드라 이 시엘로》(1919; “돌과 하늘”)
  • 《포에시아 엔 베르소》, 1917–1923 (1923; “운문시”)
  • 《포에시아 엔 프로사 이 베르소》(1932; “산문시와 운문시”)


1920년대에 이르러 히메네스는 스페인 근대 서정시의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창작 활동 외에도 아내 세노비아와 함께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의 희곡 《바다를 향한 기수들》을 번역하여 1920년에 출간하기도 했다. 히메네스와 캄프루비 부부는 RAE가 정한 표준과는 다른, 단순화된 형태의 스페인어 정서법을 고수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히메네스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부터 워싱턴 주재 명예 문화 담당관으로 임명받고 부인과 함께 스페인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2. 4. 망명과 노벨 문학상 수상 (1936년 ~ 1958년)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히메네스는 공화국 정부워싱턴 주재 명예 문화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부인 세노비아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쿠바, 미국 등지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46년 히메네스가 심장병을 앓게 되자, 부부는 아내 세노비아와 깊은 인연이 있는 푸에르토리코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히메네스는 이후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칼리지파크 캠퍼스에서 스페인어와 스페인 문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1951년부터는 푸에르토리코에 완전히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1956년 10월 25일, 히메네스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사흘 뒤인 10월 28일, 그의 아내 세노비아가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 속에서 히메네스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2년 후인 1958년 5월 29일, 아내가 사망했던 푸에르토리코의 같은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아내와 함께 고향 모게르로 보내져 6월 6일 그곳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세계

에스파냐 남부 모게르 출신이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안달루시아 지방색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초기 작품인 <수심에 찬 아리아>(1903), <머나먼 정원>(1905), <엘레지>(1908) 등은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자연과 고독에 대한 애정을 반영하며, 다소 음울하면서도 화려한 소리와 색채가 특징이다.

1916년 무렵부터 히메네스는 운율이나 형식 등 외적인 장식을 버리고 순수한 형태를 자유시에서 찾으려는, 소위 '벗은 시'(poesía desnudaspa)로 나아갔다. <신혼 시인의 일기>(1917)와 <돌과 하늘>(1919) 이후의 작품들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는 음악과 색깔이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1908년부터 1912년까지는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잡지 《프로메테오》에 기고가로 참여하기도 했다.[6]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장편 산문시 《플라테로와 나》(1917)로, 작가와 그의 당나귀 이야기를 다루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 외에도 《영적인 소네트, 1914–15》(1916), 《돌과 하늘》(1919), 《밑바닥의 동물》(1947) 등 많은 시집을 남겼다. 그는 아내이자 작가인 세노비아 캄프루비와 함께 존 밀링턴 싱의 희곡 《바다를 향한 기수들》을 번역하는 등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5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망명지였던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망했다.

3. 1. 모더니즘에서 순수시로

에스파냐 남단 모게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안달루시아 지방색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초기 작품인 <수심에 찬 아리아>(1903), <머나먼 정원>(1905), <엘레지>(1908) 등은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자연이나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기 시는 음울하면서도 화려한 소리와 색채가 특징이다.

1916년경부터 히메네스는 시인들이 말하는 '벗은 시', 즉 순수시로 나아갔다. 그는 운율이나 형식 같은 외적인 장식을 버리고 자유시 형식에서 순수한 형태를 찾고자 했다. <신혼 시인의 일기>(1917)와 <돌과 하늘>(1919) 이후의 작품들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대표적인 장편 산문시인 <프라테로와 나>(1917)는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히메네스는 195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푸에르토리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3. 2. 주요 주제와 특징

에스파냐 남단 모게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초기 작품인 <수심에 찬 아리아>(1903), <머나먼 정원>(1905), <엘레지>(1908) 등은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자연이나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기 시풍은 음울하면서도 화려한 소리와 색채로 가득 차 있었다.

1916년경부터 히메네스는 스스로 '벗은 시'poesía desnudaes라고 부른 새로운 경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운율이나 형식 등 모든 외적인 장식을 배제하고 순수한 시 형태를 자유시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였다. <신혼 시인의 일기>(1917)와 <돌과 하늘>(1919) 이후의 작품들이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음악과 색깔은 중요한 주제였으며, 종종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되어 표현되었다.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잡지 《프로메테오》에 기고가로 참여했으며,[6] 특히 1911년과 1912년에는 여러 여성과의 관계를 묘사한 다수의 에로틱한 시를 썼다. 일부 시는 간호사 수녀와의 성관계를 암시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으나, 시에 묘사된 내용이 실제 경험에 기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장편 산문시 《플라테로와 나》(1917)이다. 이 작품은 작가와 그의 당나귀 플라테로의 이야기를 통해 고향 모게르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으며,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아내이자 동반자였던 세노비아 캄프루비와 함께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의 희곡 《바다를 향한 기수들》을 1920년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히메네스와 캄프루비는 RAE에서 정한 표준 스페인어 정서법과는 다른, 그들만의 단순화된 정서법을 사용했다는 특징도 있다.

스페인 내전 이후 망명하여 정착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푸에르토리코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지아니나 브라스키, 르네 마르케스, 아우로라 데 알보르노스, 마누엘 라모스 오테로 등 현지 작가들에게 상당한 문학적 영향을 주었다.[7]

3. 3. 《플라테로와 나》

《플라테로와 나》(원제: Platero y yo|플라테로 이 요es)는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쓴 장편 산문시이다.[3] 이 작품은 작가가 고향 모게르에서 요양하던 시기(1905년 이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작가는 이 시기에 항상 등에 태우고 다녔던 사랑하는 당나귀 '플라테로'와의 교감, 고향의 풍경,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작품에 담았다. 출간 연도는 1917년으로 알려져 있으며[3], 일부 자료에서는 1914년으로 언급되기도 한다.[3]

작품 내용은 작가 자신과 그의 당나귀 '플라테로'를 중심으로, 고향 안달루시아 지방 모게르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고향 지역을 찬양했다.[3]

《플라테로와 나》는 히메네스의 작품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번역을 통해 미국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4. 주요 작품 목록


  • 『보라색 영혼』(Almas de violeta), 1900
  • 『수련』(Ninfeas), 1900
  • 『서정시집』(Rimas), 1902
  • 『슬픈 아리아』(Arias tristes), 1903
  • 『먼 정원』(Jardines lejanos), 1904
  • 『순수』(Elejías puras), 1908
  • 『중간의 애가』(Elejías intermedias), 1909
  • 『푸른 잎』(Las hojas verdes), 1909
  • 『비가』(Elejías lamentables), 1910
  • 『봄의 발라드』(Baladas de primavera), 1910
  • 『울려 퍼지는 고독』(La soledad sonora), 1911
  • 『전원시』(Pastorales), 1911
  • 『마법과 고통의 시』(Poemas májicos y dolientes), 1911
  • 『우수』(Melancolía), 1912
  • 『미궁』(Laberinto), 1913
  • 『플라테로와 나』(요약본) (Platero y yo), 1914
  • 『여름』(Estío), 1916
  • 『마음의 소네트』(Sonetos espirituales), 1917
  • 『신혼 시인의 일기』(Diario de un poeta recién casado), 1917
  • 『플라테로와 나』(전체본) (Platero y yo), 1917
  • 『영원』(Eternidades), 1918
  • 『돌과 하늘』(Piedra y cielo), 1919
  • 『제2시선』(Segunda antología poética), 1922
  • 『시』(Poesía), 1923
  • 『미』(Belleza), 1923
  • 『노래』(Canción), 1935
  • 『나의 시의 목소리』(Voces de mi copla), 1945
  • 『모든 계절』(La estación total), 1946
  • 『코럴 게이블스의 로맨스』(Romances de Coral Gables), 1948
  • 『심연의 짐승』(Animal de fondo), 1949
  • 『빛나는 언덕』(Una colina meridiana), 1950
  • 『생각에 잠긴 얼굴』(La frente pensativa), 2001년 출판 (1911-1912년 미발표 시 포함)
  • 『나는 나 아니다』(I Am Not I)
  • 『사랑의 책: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잃어버린 시』, 2022년 출판

5. 한국에의 영향

(작성할 내용 없음)

6. 평가

에스파냐 남단 모게르 출신이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안달루시아 특유의 지방색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초기 작품인 <수심에 찬 아리아>(1903), <머나먼 정원>(1905), <엘레지>(1908) 등은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자연이나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기 그의 시풍은 음울하면서도 화려한 소리와 색채로 가득 차 있었다.

1916년경부터 히메네스는 시인들이 '벗은 시'(poesía desnudaes)라고 부르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운율이나 형식 같은 외적인 장식을 버리고, 자유시 형식을 통해 순수한 시 형태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혼 시인의 일기>(1917)와 <돌과 하늘>(1919) 이후의 작품들이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주요 주제는 음악과 색깔이었으며, 때로는 이를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는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잡지 《프로메테오》(Prometeoes)에 1908년부터 1912년까지 글을 기고했다.[6] 1911년과 1912년에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다룬 에로틱한 시들을 다수 썼다.

히메네스는 정신 붕괴와 우울증으로 프랑스마드리드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3] 그의 대표적인 장편 산문시인 《플라테로와 나》(Platero y yoes, 1914년 초판, 1917년 증보판)는 작가와 그의 당나귀 플라테로의 이야기를 통해 고향 모게르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16년 미국에서 스페인 출신의 작가이자 시인인 세노비아 캄프루비와 결혼했다. 세노비아는 그의 창작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자 협력자였다. 부부는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의 희곡 《바다로 가는 기사들》(Riders to the Sea영어)을 함께 번역(1920)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히메네스와 세노비아는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1946년에 정착했다. 망명 후 히메네스는 심한 우울증으로 8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푸에르토리코 대학교에서 스페인어 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푸에르토리코 문단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아니나 브라스키, 르네 마르케스, 아우로라 데 알보르노스, 마누엘 라모스 오테로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7] 푸에르토리코 대학교는 그의 공로를 기려 캠퍼스 건물과 작문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 코럴게이블스의 마이애미 대학교메릴랜드 대학교에서도 교수로 활동했으며, 메릴랜드 대학교의 스페인어·포르투갈어 학과 건물은 1981년 '히메네스 홀'로 명명되었다.

히메네스의 시적 산출량은 방대했으며, 그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원제한국어 제목
1916Sonetos espirituales 1914–1916es영적인 소네트, 1914–15
1919Piedra y cieloes돌과 하늘
1923Poesía en verso, 1917–1923es운문시
1932Poesía en prosa y versoes산문시와 운문시
1945Voces de mi coplaes나의 노래의 목소리
1947Animal de fondoes밑바닥의 동물



히메네스와 캄프루비는 RAE의 표준과는 다른, 단순화된 형태의 스페인어 정서법을 사용했다.

1956년 히메네스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 소식을 들은 지 이틀 만에 아내 세노비아가 난소암으로 사망했고, 히메네스는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2년 후인 1958년 5월 29일, 아내가 사망했던 푸에르토리코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부의 유해는 스페인 모게르에 함께 안장되었다.

7. 대중 문화


  • 히메네스의 인용구 "만약 줄이 그어진 종이를 준다면, 반대 방향으로 쓰시오"는 레이 브래드베리의 소설 『화씨 451』(1953)의 표제시(epigraph)로 사용되었다.
  • 같은 인용구는 앨리스 세볼드의 소설 『러블리 본즈』(2002)에도 사용되었다.
  • 1968년, 스페인 영화 감독 알프레도 카스테욘은 히메네스의 소설 『나와 플라테로』를 같은 제목의 영화로 각색했다.
  • 푸에르토리코 작가 지아니나 브라스키의 스팽글리시 소설 『요요 보잉!』(1998)에는 시인과 예술가들이 히메네스를 비롯하여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루이스 데 곤고라, 루벤 다리오, 파블로 네루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줄리아 데 부르고스 등 스페인어권 시인들의 천재성을 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8]
  • 스페인의 한 록 밴드는 히메네스의 소설 제목을 따서 플라테로 이 투(Platero y Tú)라는 이름을 지었다.

8. 갤러리



8. 1. 초상화

모게르에 있는 플라테로의 동상(안토니오 레온 오르테가(Antonio León Ortega), 1963년 작품)


히메네스 생가 전경. 현재 세노비아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집 박물관(Casa Museo Zenobia y Juan Ramón Jiménez).

8. 2. 조각


8. 3.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Juan Ramón Jiménez https://www.britanni[...]
[2] 뉴스 Moguer y Juan Ramón Jiménez http://viajes.elmund[...] 2018-02-17
[3] 웹사이트 Juan Ramón Jiménez. Biografía http://www.cervantes[...] 2018-02-17
[4] 논문 Homenaje. María Isabel Sánchez Concha de Pinilla. 1889 - 1977 http://www.cemhal.or[...] 2014-01-01
[5] 웹사이트 Georgina y yo: Cuando Juan Ramón Jiménez fue trolleado por una falsa admiradora https://verne.elpais[...] 2024-08-09
[6] 웹사이트 Prometeo (Madrid. 1908) https://hemerotecadi[...] Hemeroteca Digital 2022-09-07
[7] 뉴스 Elemental Creature http://www.the-tls.c[...] 2018-02-17
[8] 서적 Yo-Yo Boing! https://books.google[...] Latin American Literary Review Press
[9] 웹사이트 Calle de Juan Ramón Jiménez http://madrid.callej[...] Hispanetwork Publicidad y Servicios, SL 2018-02-17
[10] 웹사이트 C/ Juan Ramón Jiménez http://valencia.call[...] Hispanetwork Publicidad y Servicios, SL 2018-02-17
[11] 문서 Mantecón은 어머니의 성(人名#스페인어권의 이름 참조).
[12] 문서 岩波文庫『プラテーロとわたし』의 「一八九六年、十五歳のとき」(384頁)기술에 근거하지만, 彌生書房『ヒメネス詩集』에서는 「十六歳のとき(一八九八年)」(153頁)라고 되어있다.
[13] 웹사이트 Juan Ramón Jiménez Cronología 1881-1915 http://cvc.cervantes[...]
[14] 문서 상기 『플라테로와 나』에 따르면, 1914년, 『플라테로와 나』가 처음으로 한 권의 책이 되어, 마드리드의 라 레크투라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때까지 단편적으로 발표되었던 산문시 135편 중에서, 편집자가 아동용 읽을거리로 63편을 고르고, 저자가 여기에 한 편을 더 쓴 축약판이다.(387페이지) 1917년, 『플라테로와 나』의 완전판이 마드리드의 카리에하사에서 출판되었다.(388페이지)라고 하는데, 『히메네스 시집』에서는 1907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4년 후(1911년)에 세상에 내놓았다(155페이지)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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